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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 결핍이 필요해

by 희희초초 2024. 1. 26.

양익준과 제주도

제목부터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시인의 사랑>이라니 굉장히 심오하고 깊이가 있는 영화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늘 그렇듯 배우를 보고 선택한 영화입니다. 양익준 배우가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한다는 걸 알고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촬영지가 제주도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제주도를 무척 좋아합니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방문했었고 퇴사 후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척 반가운 영화였습니다.

웃긴데 슬픈 시인의 삶

남자 주인공인 현택기는 시인입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서 줄곳 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시인이지만 시인답지 못합니다. 현실적으로 시인으로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그러니 물질적으로도 풍요롭지 못합니다. 가진 게 없는 그는 오죽하면 정자 수도 적습니다. 이게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시인의 사랑>은 이처럼 웃기면서 슬픈 그런 영화입니다. 월수입은 고작 30만 원 정도입니다. 이마저도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도 아닙니다. 운이 좋으면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귀엽고 깜찍한 초등학생들조차 시인 현택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 시인이 그렇게 생겼느냐며 작고 뚱뚱하다고 놀립니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그는 잘 지냅니다. 그런 부족함 따위가 그에게는 큰 장애물이 아닙니다. 부족한 걸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현실이 시궁창도 아니고 부족함은 있으나 절박함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아내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시인의 시는 어떨까요? 그의 시는 그의 이런 평온한 성향을 반영해 매우 잔잔하고 아름답습니다. 결핍이 없으니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잔잔한 일상이 파국으로 치닫다

좋게 보자면 평온하고 나쁘게 보자면 따분한 그의 일상에 어느 날 커다란 돌멩이가 던져집니다. 한 소년이 나타나면서 시인 현택기의 잔잔한 일상은 파국을 맞이합니다. 현택기는 소년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의 행동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입니다. 현택기는 양성애자였던 걸까요? 영화는 단순히 남자와 남자의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루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현택기에게 소년은 가질 수 없는 상징적인 인물이 됩니다. 즉, 현택기는 소년을 만나면서 결핍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결핍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

무언가를 갖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마음이 어떨까요? 간절하고 애틋하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도 느낄 겁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하던 시인의 일상이 흔들리면서 마침내 그는 시다운 시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평단에서 인정받는 시인으로 거듭납니다. 예술가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 여러 자극과 변화가 필요할 겁니다. 현택기가 시인르로 살기 위해서는 그런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

그러고 보면 예술가들의 어린 시절은 굉장히 인상적인 기억이 있거나 일반 사람들보다 많은 풍파를 겪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픔과 경험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작품으로 승화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예술가에게 결핍이 필수조건이라면 저는 그냥 과거의 현택기처럼 잔잔한 일상을 살고 싶네요. 너무 강렬한 자극과 변화 뒤에는 책임져야 할 무시무시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극 중에서 소년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괴로워합니다. 그런 소년에게 시인은 말합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그 사람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요. 굉장히 인상적인 대사였습니다. 몇 번을 곱씹으며 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나도 그 한 사람이길 바랐습니다.

시인의 사랑을 읽고 싶다

억지스럽지 않은 전개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것도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의 사랑>을 보고 나서 제주도에 가고 싶어 졌습니다. 작고 뚱뚱하고 약간은 답답해 보이는 시인 현택기를 만나 제주도 숲길을 산책하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입니다.
 
 

시인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