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 빼고 모든 걸 가진 여자
영화가 시작되고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온몸에 붉은 장식을 덧칠하고 있는 여자들은 벌거벗고 있습니다. 붉은 나체들의 퍼포먼스는 의미를 발견하기도 어려웠고 인상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주인공 수잔은 화려하고 거대한 대저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술관 관장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름난 인물이자 남편은 무척 잘생겼습니다.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수잔이지만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습니다. 그녀의 삶에는 행복이 빠져 있었습니다.
모순적인 삶을 사는 여자
위에서 말한 붉은 나체쇼는 수잔의 전시회의 오프닝 무대였습니다. 그녀의 무대에 무한한 박수와 함께 극찬의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정작 수잔은 ‘쓰레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수잔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수잔은 굉장히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상류사회와 어울리고 그들에게 속하기 위해 쓰레기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는 수잔은 자신의 엄마를 증오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를 닮아갑니다. 이 또한 모순적이죠.
어느 날 도착한 책 한 권
그렇게 껍데기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수잔에게 책 한 권이 도착합니다.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로 이 책은 그녀의 전 남편 에드워드가 쓴 책이었습니다. 수산 덕분에 이 책을 쓸 수 있는 영감을 받았다며 그녀를 책의 첫 번째 독자로 추대한 것이죠. 수잔은 불면증이 심했습니다. 에드워드는 그런 수잔을 야행성 동물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야행성 동물을 영어로 번역하면 '녹터널 애니멀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제목은 수잔에게 바치는 책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수잔은 어떤 마음으로 책을 펼치게 될까요? 아마 오랜만에 옛사랑과의 재회가 약간은 설렜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내용일지 기대되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흥미로운 액자식 구성 영화
수잔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칩니다. 이제 진짜 영화가 시작됩니다. 소설은 수잔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트립니다. 영화는 소설과 실제 현실, 과거가 번갈아 등장하는 액자식 구성입니다. 긴장감과 몰입감이 뛰어나 한순간도 딴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소설의 읽을수록 수잔은 괴로워집니다. 에드워드에게 잘못했던 일들과 그로 인해 그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 생각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토니입니다. 그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한순간에 아내와 딸을 모두 잃게 됩니다.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아주 나약하고 볼품없는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아마도 토니는 에드워드 자신일 겁니다. 모두가 자신을 떠나고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괴로웠을 에드워드를 생각하니 수잔은 마음이 아픕니다. 과거 수잔은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에드워드를 한심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비로소 에드워드는 소설가의 꿈을 이루었고 자신의 소설을 통해 수잔의 감정 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복수를 시작한 겁니다.
빨간색과 녹색의 결말
글로 쓰다 보니 긴장감이 덜하지만 기억에 남는 한 가장 최고의 스릴러 작품이었습니다. 수잔의 화려한 삶을 대변하는 LA와 소설의 배경으로 그려지는 황량한 텍사스를 비교하는 재미와 탄탄한 이야기 전개는 잠시의 따분함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음향효과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쿵쾅거리는 심장 뛰는 소리를 음향효과로 활용한 덕분에 심리 스릴러의 느낌을 잘 살렸고 빨간색으로 시작해서 녹색으로 끝나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빨간색과 녹색은 서로 보색 관계이기 때문이지요. 끝내 섞일 수 없는 수잔과 에드워드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완성되는 복수
수잔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깁니다. 그 후 아주 오랜만에 에드워드를 만날 준비를 합니다. 녹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수잔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에드워드에게 향합니다. 결혼반지를 빼고 그에게 향하는 표정에서 그리움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습니다. 에드워드는 조용한 마침내 복수를 완성한 겁니다. 영화는 조용히 끝나지만 어느 때보다 묵직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찹 감각적이고 세련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감독이 톰 포드였네요. 우리가 아는 디자이너 톰 포드가 맞습니다. 세상에!